글 임항 한국환경공단 비상임이사
지난 주말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를 다녀왔다. 크지 않은 우리나라 영토에 제주도가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작지 않은 위안이다. 그토록 아름답고, 철마다 다채로운 자연과 훌륭한 음식이 있는 보물섬에 언제든 훌쩍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축복으로까지 느껴진다. 대학교 1학년 때인 1978년, 제주도에 일주도로도 없던 시절에 친구 네 명과 함께 무작정 바닷가를 걸어 보름간 배낭여행을 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신혼여행은 물론, 일과 휴식, 등산, 의례적인 세미나 등등 이런저런 목적으로 제주도를 자주 갔다. 전부 세어보지 않았지만, 줄잡아 30번 이상 방문한 것으로 기억한다.
11월 초는 단풍 구경하기에 약간 이른 시기이긴 했다. 그렇긴 해도 예년에 비추어 5.16도로와 1100도로의 단풍은 거의 절정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도로변 단풍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아직도 푸른 활엽수 잎이 많이 보였다. 천연기념물인 비자림의 천년비자나무 주변에는 새빨갛고 작은 단풍잎이 일품인 단풍나무 군락이 있다. 십수 년 전 보았던 그 단풍 절경을 다시 볼 것이라고 기대했건만, 단풍나무들은 온통 초록빛. 정말 한 잎에도 단풍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충격이었다. 기후변화의 징후들은 점점 늦어지는 단풍철에서도 볼 수 있다. 이제 북한산에서도 단풍은 11월이 돼서야 절정에 이른다.
환경의 변화는 늘 우리가 감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게, 더 빠르게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경제활동과 사회간접자본 건설 등 개발행위는 땅과 물과 대기, 그것들에 기대어 사는 생물들에 주로 나쁜 영향을 끼치기 일쑤다. 물론 그런 개발압력은 어느 정도까지는 생태계의 자정작용에 의해 중화되고, 사람과 자연의 공존을 파괴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개발압력이 특정 생태계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 즉 환경용량을 초과할 경우 개발 주체인 사람들에게 여러 형태의 역습을 몰고 온다. 수질과 대기의 오염은 그 직접적인 영향으로 사람들이 눈과 피부로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비교적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물론 물과 공기를 제대로 깨끗하게 지키는 것도 쉬운 과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더 어려운 것은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기후변화 원인 물질, 더 편리한 생활을 위한 플라스틱의 양산,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각종 화학물질과 독성물질의 범람과 같은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위험을 어떻게 통제하느냐 하는 과제다.
제주도에는 환경 관련 현안과 대립이 늘 차고 넘친다. 지금도 제2공항 건설 여부를 둘러싸고 찬성과 반대진영이 날을 세우고 있다. 갈등은 개발 욕구와 환경용량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관점 차이에서 비롯된다. 성산 제2공항 설립을 요구하는 측은 늘어나는 관광객과 여행수요를 원활하게 충족시키기 위해 그것이 필요하고, 건설과정의 환경 훼손과 운행과정의 위험 등 부작용은 기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진영은 제주도가 받아들이는 관광객과 늘어난 인구가 이미 제주도의 환경용량을 초과했으므로 더 이상의 개발을 자제하고, 관광객 수를 늘리는 것보다 관광프로그램 다양화를 통한 관광객당 소비와 체류일수를 늘리는 질적 도약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또한 기존의 제주국제공항의 남북활주로 사용 확대 등을 통해 늘어난 항공 수요도 충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책사업이나 환경에 대한 영향이 큰 개발사업에 대해서는 편익과 비용을 견주어 보는 예비타당성조사 과정이 있고, 환경영향평가 과정이 있다. 전문가들이 객관적으로 평가한 결과에 대해 승복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에 정치적 선입견이나 개입이 작용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인간의 욕심은 객관적 한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환경문제에서는 총량규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 단위면적당 인구, 도로의 총연장과 면적, 해안선 중 인공구조물 비율, 땅이 좁은 나라나 도시의 경우 인구당 자동차 대수까지도 상한선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반면 하한선을 설정해야 하는 환경지표도 있다. 국토 중 법정 보전지역의 비율, 녹지 비율, 인구 밀집 지역 내 개발제한구역 등이 그것이다. 통계수치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성을 지니기 때문에 중요하고, 조작되지 않은 통계수치는 개인과 정부의 욕심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기 때문에 존중돼야 한다.
더 고약한 환경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고, 심지어 발생지역과 무관하게 국경도 없이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온실가스 유발물질이다. 이 문제에는 총량규제(나라별, 부문별 쿼터 할당)와 오염자부담 원칙에 따른 환경세가 대처방안으로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에 늘 목마른 각국 정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이 단순한 원칙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이해집단의 반발 탓에 관철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내 손자가 기후재앙으로 성인도 되기 전에 죽을 수 있다는 상당히 높은 가능성은 당장 내 눈앞의 이해관계보다 강력하지 않은 것이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플라스틱 남용으로 인한 바다 오염도 마찬가지 난제다. 미래에 불확실한 위험에 대비해 지금 생활의 편리함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게 사람의 보통 성향인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경제학의 정의대로 언제나 욕심이 무한하고, 늘 합리적으로 소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교육에 의해서, 또는 강력한 설득에 의해서 비합리적으로, 이타적으로 행동하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이기심에 대항하여 늘 작동하는 강력한 견제 장치는 역설적으로 다시 경제적 규제와 인센티브다. 우리는 환경문제라고 하면 경제적인 합리성과 뭔가 반대의 것, 신비로운 어떤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도 역시 돈이 오가야 한다. 세금이나 부과금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동차를 덜 운행하거나 대중교통과 친환경 차를 이용하고, 플라스틱 컵을 덜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필(必)환경시대'가 기업도 환경을 우선해 고려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더 이상 어려운 시대를 일컫는다면, 기업과 소비자의 행태 변화를 이끌 현명한 규제를 확립하는 유능한 정부가 그런 시대를 앞당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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