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나 시골길을 가다 보면 풍경 속에 큰 드럼통처럼 보이는 시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곡종합처리장’이라고 불리는 이 시설은 무엇을 하는 곳일까? 미곡종합처리장은 RPC(Rice Processing Complex)로 불리며 농민으로부터 곡물을 매입, 이를 처리 가공해 소비자가 곡물을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중간다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RPC와 KTL은 무슨 관계가 있기에 RPC 안에 KTL 인증마크가 수두룩하게 붙어있는지 현장으로 가서 알아보았다. 20년 넘게 농민들과 동고동락한 산업표준본부 현장교정지원센터 식구들과 함께 우리가 매일 먹는 밥 한 그릇 속에 가득 담겨있는 KTL의 정성을 따라가 보자.
예전에는 농민이 추수 후 직접 곡물을 건조하고 보관했지만, 이제는 정부나 공공단체가 곡물의 확보와 가격조절을 목적으로 한 추곡수매제도의 실시로 시장을 거치지 않고 농민으로부터 직접 일정량의 곡물을 사들이고 있다. 정부가 정한 곡물의 가격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가격보다 높게 책정되며, 다음 해에 싼값에 소비자에게 판매된다. 이 과정에서 RPC의 역할이 중요하다. 곡물 매수자인 농민과 곡물 매입자 역할을 하는 RPC간에 미세한 눈금 하나 차이에 곡물의 매수매도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날이 선 순간이 된다.
일례로 예전에는 추곡 수매 시 동네잔치처럼 음식을 차려놓고 막걸리와 함께 농민들과 마주했지만, 저울(RPC에서는 ‘호퍼스케일’로 불린다)에 쌀이 올라가는 순간 첨예하게 대립하는 의견에 ‘낫’을 들고 쫓아오기도 해서 막걸리를 일절 없앴다는 일화도 있다. 이뿐 아니라 곡물 수매 시 수분, 중량, 등급판정에 불신이 커져 정부에 민원이 끊이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 형사 고발까지 일어나 현장교정지원센터 김기만 팀장은 법원에서 증언까지 한 예도 있다.
이러한 민원과 잡음을 해결하고자 KTL은 1999년부터 미곡종합처리장(RPC)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의 의뢰를 받아 곡물수매장비인 호퍼스케일, 벼등급판정기, 톤백저울, 쌀포장기 등의 교정 및 시험검사를 시작했다. 교정사업의 의뢰로 KTL이 표준화 사업에 앞장서자 농민단체의 신뢰가 높아져 민원이 현저히 낮아졌다. 지금은 누구보다 농민과 시·군에서 먼저 KTL 교정 및 시험검사 후 수매하기를 원한다. 또한, 곡물 매입자금을 지원할 때 농림축산식품부와 시·군에서 KTL의 시험검사를 우선순위로 하고 있다.
모내기가 시작되는 5월부터는 RPC의 일 년 농사가 또다시 시작된다. 직원들은 국립종자원(9개 지역)을 시작으로 전국 RPC(400개소) 교정 및 시험검사가 끝나는 11월 중순까지는 장기간 출장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일주일에 2,000㎞ 이상 화물차로 이동하고 있다. 3~4인이 함께 움직여야 하므로 더블캡 화물차를 이용하는데, 뒷자리 좌석은 꽤 불편해 장거리 이동이 녹록지는 않다. 더군다나 1,000㎏ 이상이 되는 분동을 가지고 이동하기 때문에 바퀴가 펑크 나기도 예사. 일 년에 타이어를 두 번씩 교체해주는 일도 필수가 됐다.
전국의 RPC를 돌아다니는 일은 하루 세끼 식당을 찾아 식사하고, 모텔 생활을 하며 빨랫감을 쌓아 돌아가는 일이 포함된다. 특히 일찍 추수할 수 있는 조생종의 추곡 수매가 시작되는 추석 2주 전부터는 밤 11시까지 퇴근은 당연하고, 주말도 예외는 없다. 검사를 받지 못하면 수매도 받을 수 없지만 곡물매입자금도 지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장교정지원센터 이기영 연구원은 “RPC 지원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결혼해서 다행이지, 총각이었음 아마 결혼도 못 했을 거예요!”라는 농담을 건넨다. 주어진 일에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고단함이 깊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래도 현장에서는 늘 웃음이 가득한 현장교정지원센터 식구들. 누구보다 늘 함께 일하는 협력직원분들과 농협 직원분들이 함께 협업해 ‘농민이 행복한 RPC’를 만들어가고 있다. 취재를 위해 갔던 여주 이천은 ‘진도자동화’라는 협력업체가 있는 곳으로, 1지역인 경기, 강원, 충청, 종자원, 농관원을 관리한다. ‘진도자동화’의 김석구 사장은 RPC 경력이 25년으로 현장에서는 베테랑으로 통한다. 특히 교정검사 시 고장이나 기술적 문제를 바로 해결해 RPC기관에서 만족도와 신뢰도가 높기로 정평이 나 있다.
김기만 팀장은 “협력업체와 농협 직원분들의 도움과 협업으로 RPC 사업이 원만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서로를 믿고 아껴주는 마음으로 일하고 있어 감사하다”고 전했다.
현장교정지원센터 RPC 사업은 정부가 먼저 그 공로를 치하해 많은 표창을 받은 바 있다. 국무총리상을 비롯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표창, 농협중앙회의 감사패, 산업통상자원부에서는 대통령표창도 받았다. 사내보다 외부에서 먼저 인정을 받는 RPC 사업.
화려한 표창 속에는 곡물 수매 시 함께 들어있는 쥐를 발견해 처리하고, 메뚜기를 골라내는 일 그리고 쏟아지는 곡물의 수많은 먼지에 알레르기약을 먹어가며 교정사업을 진행하는 고단한 업무가 포함되어 있다. 지난 4월에는 정동희 원장이 경상남도 사천 사남농협의 밀 건조시설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오셔서 회사 유니폼에 쌓이는 먼지를 보시고 유니폼을 바꿔주신다고 하신 말씀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고 온 직원이 입을 모으고 있다.
농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쌀, 한 톨도 허투루 할 수 없어 오늘도 전국 방방곡곡의 RPC 지원센터를 출동하는 산업표준본부 현장교정지원센터 ‘특공대들’. 농민들의 귀한 쌀이 RPC에 들어와 10㎏, 20㎏ 포장되어 나가는 순간까지 KTL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따뜻한 밥 한 공기 속에 듬뿍 담겨있는 RPC의 정성. 그 시작과 끝은 농민을 향한 사랑, 주어진 일에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 하는 KTL 현장지원센터 특공대들의 일상인 것이다. 소박한 밥상이 선물로 여겨지는 것은 누군가의 수고 덕분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